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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20 최영미, 사랑의 시차
- 2013.11.01 몰랐지
- 2013.08.29 이렇게
- 2013.08.29 비
- 2013.08.01 나
- 2013.07.17 Naomily
- 2013.06.01 너는
- 2013.05.24 가장
- 2013.05.21 낮은 곳으로, 이정하
- 2013.01.29 넌
사랑의 시차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 멀
어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面璧)한 두 세상
이렇게 금방 끝나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옆에 있었다면. 너한테 지루해질 시간도 조금 있었다면. 네가 미울 때도 있었다면. 그런 다음에 버려졌다면. 그랬다면 나도 조금은 괜찮을 수 있었을까.
따뜻한 이불 속에서 갑자기 쫓겨난 사람처럼 봄비처럼 따뜻했던 오늘이 나는 어느 겨울날보다 더 추웠다고.
오늘 날씨는 마음에 들어, 우울해 할 수 있지. 아프건 슬프건 서로 멀쩡한 얼굴만 보이는 것도 어른들의 세상에선 의무 같은 것. 그래서 어른들은 마음대로 우울해할 자유도 없지만 이런 날은 날씨 탓이 먹혀들거든. 기분이 왜 그래? 옆사람이 나 때문에 자기까지 힘이 빠진다는 듯 불편하게 물어오면은 그때까지 마음 껏 우울해하던 나는 좀 힘든 척 웃어보이며 이렇게 말하면 되는거야. 어,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쓰이게 해서 미안해, 날씨가 좀 그래서. 커피 마실래?
사실 오늘 비, 나 때문인지도 몰라. 며칠 전부터 내가 그랬거든, 비나 왔으면 하고. 너도 알거야, 내 의지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때. 가장 무기력한 순간. 그냥 짓거리는 소리. 비나 왔으면.. 그래서 드디어 비가 오는데. 비는 오는데... 난 여전히 기분이 아주 나빠. 여전히 뭘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어.
죽을 것 같다고 몸부림 치기엔 우리가 헤어진 지 너무 오래 됐었고. 이제 살만하다고 하기엔 이별이 너무 생생해. 처음부터 만나지 말걸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고. 우린 정말 헤어졌구나 인정하기엔 아직 일러. 이럴 거면 왜 날 사랑했냐고 원망하기엔 내가 누린 행복이 너무 컸고. 그 행복을 감사하기엔 지금의 불행이 너무 커. 아무데서나 흑흑 거리고 울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고.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면서 웃어버리기엔 난 아직 어려. 사랑한다고 말하려니까 우린 이미 헤어졌고. 사랑했었다고 말하려니 나는 아직 너를 너무 사랑하고. 눈물이 나지 않으니 울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울고 있지 않다고 말하기엔 내 마음이 너무 아파.
날씨가 거지같아. 너무 우울하다고 한 번 시원하게 울고도 싶지만 운다고 뭔가 달라질지도 모르겠어. 난 지금 너무 기분이 나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난 너무 기분이 나빠. 난 어쩌면 좋을까.
난 어쩌면 좋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어서. 비나 오면 좋겠다고, 비나 오면 좋겠다고.
나 여기까지 왔어.
이게 사랑인지, 아니면 집착인지 미련인지도 이젠 모르겠어.
미쳤다고 네가 내 눈앞에서 욕해줘. 그럼 정신 차릴게.
난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왔어. 12살 때인 것 같아. 너한테 말을 걸 용기를 쥐어짜는데 3년이 걸렸어. 난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서웠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정상인 것처럼 느끼려고 시니컬한 썅년이 되는 법을 배웠어. 그런 기분을 없애려고 남자들이랑 잤어. 근데 소용없더라. 우리가 사귀었을 때 난 너무 무서웠어. 네가 내 삶을 망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난 널 밀쳐냈고, 네가 마치 네 잘못인 것처럼 생각하게 했어. 그렇지만 난 정말 상처가 무서웠어. 소피아랑 잔 건 널 괴롭히려고 그런 거야. 날 쥐락펴락한 건 너였으니까. 그리고 난 더럽게 겁쟁이야. 왜냐하면... 난.. 이걸... 세달 전에 우리 같이 고아에 가려던 티켓을 사버렸거든. 그렇지만 난.. 참을 수 없었어.. 내가 네게 느끼는 감정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어. 이해하니? 넌 내게 벌주려 했지만 그건 무척이나 끔찍해. 너무도 끔찍해. 왜냐하면... 정말 난 널 위해 죽을 수도 있거든.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죽을 것 같아.
너는 아주 가끔 내게 전화를 걸고 내가 받을 시간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지. 몇 초간 울리다가 끊어지는 그 벨소리가 내게 남겨준 희망인 건지 아니면 내게 주는 벌인지 난 아직 그것도 몰라.
그때 모른 척 놓아버렸던 순간. 괜찮다 이해한다 말하던 니 말을 다 믿는 척 하며 울음보다 가여웠던 니 표정을 못본 척 하며 설마 내가 너 없인 못살진 않겠지, 못된 마음으로 돌아섰던 그 순간. 그때가 가슴에 얹혀서 나는 자다가도 마음이 아팠어. 그런 새벽 몸을 일으켜 생각을 하면 마음만큼 머리도 아팠지. 세탁소 옷걸이들처럼 하나를 당기면 엉켜 있던 다른 것들까지 쏟아졌어. 너를 만나고 싶다 그 한 가지 생각을 끌어내면 묻어놨던 다른 생각들이 우르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결국 풀리긴 할까, 우린 너무 다른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달라질 수 있을까, 누군가와 이야기 해보고 싶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 생각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었고.
너는 아주 가끔 내게 전화를 걸지. 받을 수도 없지만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꼼짝할 수도 없어. 지금 막 끊어진 벨소리가 희망인 건지 아니면 내게 주는 벌인지 난 그것도 몰라. 하지만 내가 너였다면 그렇게 나쁘게 떠난 나한테 전화를 걸었을까. 내가 정말 밉다면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너는 전화하지 않았을 거잖아.
나는 오늘 너한테 전화를 하려고 해.
안녕, 나야. 그러곤 나 아무 말도 못할 거야.
너는 뭐라고 대답할까. 받지 않을 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걸어볼려고 해.
안녕, 나야.
미안해.
그동안 아무 답도 준비 못했어.
엉켜 있는 옷걸이들 다 들고 여기로 왔어.
나는 그냥.
니가 너무 보고 싶었어.
가장 사랑하기 힘들 때 가장 많이 사랑해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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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것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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